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다툼과 양보: 에섹과 싯나에서 이삭이 택한 길

본문: 창세기 26:19–21, 로마서 12:18

다툼 앞에서 양보는 지는 걸까요

계약서 한 줄, 경계선 하나, 몫을 나누는 숫자 하나 때문에 오래 알던 사람과 언성을 높인 적이 있으실 겁니다. 내가 옳다는 것을 알기에 더 물러서기 어렵습니다. 이 글은 창세기 26장의 에섹과 싯나 이야기를 통해, 다툼 앞에서 양보하는 것이 왜 패배가 아닌지, 그리고 언제 지키고 언제 내려놓아야 하는지 함께 생각해 보려는 글입니다.

에섹과 싯나, 우물 이름이 말해 주는 것

지난 글에서 이삭은 아버지의 우물을 다시 팠습니다. 그리고 그랄 골짜기에서 새 우물도 팠습니다.

이삭의 종들이 골짜기를 파서 샘 근원을 얻었더니 (창 26:19)

메마른 골짜기에서 솟는 샘 근원은 목자들에게 큰 기쁨이었을 것입니다. 그런데 기쁨은 오래가지 않았습니다. 그랄 목자들이 와서 “이 물은 우리의 것이라”(20절) 하며 다투었습니다. 이삭은 그 우물 이름을 에섹이라 불렀습니다. 다툼이라는 뜻입니다.

이삭의 종들은 또 다른 우물을 팠습니다. 그러자 그들이 또 다투었고, 이삭은 그 이름을 싯나라 하였습니다(21절). 대적, 미움이라는 뜻입니다.

두 이름에는 이삭의 속마음이 담겨 있는 듯합니다. 그는 아무렇지 않았던 것이 아닙니다. 다툼이 아팠고, 적대가 서운했습니다. 그래서 그 기억을 이름으로 남겼습니다. 양보하는 사람도 상처를 느낍니다.

이삭은 권리 주장보다 이동을 택했습니다

이삭의 종들이 판 우물이었으니, 권리로 따지면 이삭 쪽이 할 말이 많았습니다. 그런데 본문에는 이삭이 따지거나 빼앗긴 우물을 되찾으려 한 장면이 없습니다. 그는 다른 곳으로 옮겨 다시 팠습니다.

이것은 겁이 나서 도망친 것과 다릅니다. 이삭은 우물보다 더 큰 것을 알았습니다. 물의 근원은 한 골짜기에 묶여 있지 않고, 그를 그 땅에 머물게 하신 하나님께 있었습니다. 그래서 한 우물을 잃어도 삶의 근원을 잃지는 않았습니다.

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 (롬 12:18)

바울은 “할 수 있거든”, “너희로서는”이라고 말합니다. 화목이 늘 가능한 것은 아니지만, 내 쪽에서 할 수 있는 몫은 하라는 뜻입니다. 이삭은 자기 쪽의 몫을 했습니다.

지켜야 할 싸움과 내려놓을 싸움

그렇다고 모든 싸움을 피하라는 말은 아닙니다. 양보가 늘 정답은 아닙니다. 약한 사람을 보호해야 할 때, 진실이 왜곡될 때, 가족의 생계가 위협받을 때는 지켜야 할 자리가 있습니다. 법적인 권리가 걸린 문제라면 감정으로 결정하지 말고 전문가와 상담하시기 바랍니다.

분별을 돕는 질문을 몇 가지 적어 봅니다.

  • 이 싸움에서 지키려는 것이 내 자존심인가, 다른 사람의 안전과 공의인가?
  • 이 우물을 잃으면 정말 살 길이 막히는가, 아니면 다른 곳을 팔 수 있는가?
  • 이기고 나서도 이 관계를 계속 이어 갈 수 있는가?

돈 문제로 가족과 부딪히는 상황이라면 가족 간 돈 갈등을 다룬 글도 함께 읽어 보시면 좋겠습니다.

이삭의 이야기는 싯나에서 끝나지 않습니다. 그는 한 번 더 옮겨 우물을 팠고, 그 우물에는 전혀 다른 이름이 붙습니다. 그 이야기는 다음 글에서 이어 가겠습니다.

묵상 질문

  1. 지금 내가 붙들고 있는 에섹과 싯나는 무엇입니까?
  2. 그 다툼은 지켜야 할 싸움입니까, 내려놓아도 될 싸움입니까?

기도

주님, 옳고 그름을 따지는 마음보다 주님을 신뢰하는 마음을 주소서. 지켜야 할 것은 담대히 지키고, 내려놓을 것은 기꺼이 내려놓게 하소서. 제 쪽에서 할 수 있는 화목의 몫을 감당하게 하소서. 아멘.

“다툼과 양보: 에섹과 싯나에서 이삭이 택한 길”에 대한 댓글 1개

  1. […] 않고 다음 우물을 팠습니다. 그 끝에 르호봇이 있었습니다. 이 장면은 에섹과 싯나 묵상에서 더 자세히 […]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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